모로코 여행 후기 3 : 마라케시 야시장

야시장을 기대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발터 뫼르스의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에는 판타지 세계에의 야시장에 대한 장황하지만 매력적인 묘사가 몇 장이나 이어진다. 나는 그 장면을 아주 좋아하는 반면 실제 야시장에서는 전혀 그런 매력을 느껴보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야시장이라는 제마엘프나는 다를까?


숙소를 나와 제마엘프나 시장으로 간다.

복잡한 골목은 몇 번 다녔다고 조금은 익숙해졌다. 동양인을 쳐다보는 시선만 빼고는.

낮에 한 번 다녀온 길이라, 무려 지도 없이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분명 낮에 갔던 곳인데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어있는 시장터. 너무 많은 정보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쯤 처음으로 각인되는건 후각이다. 오토바이에서 뿜어나오는 매캐한 냄새,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의 것이라고 믿고싶은 오줌 지린내, 그리고 온갖 고기와 생선들이 향신료와 함께 숯불에 구워지는 탄내.

식욕을 돋우는 탄내의 출처를 찾는 와중에, 후각 다음으로 각인되는 것은 청각이다(시각은 의외로 그 다음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북과 기타를 닮은 전통 악기의 소리, 장사치들이 두리번거리는 손님을 앉히기 위해 애쓰는 소리, 그리고 이 모든 소리를 하나의 벽으로 만드는 수많은 언어와 톤과 어조와 감정의 몰탈...

후각과 청각에 비하면, 시각은 이 정보들을 이해하려 할 때 조그만 가이드가 되는 정도이다. 여기저기 자리잡고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 바닥에 싸구려 LED 장난감이나 어디선가 떼온 전통공예품을 늘어놓고는 팔 생각도 없어보이게 앉아있는 할머니들, 화려한 조명을 붙인 트럭에 서서 과일주스를 팔거나 야장을 차려 꼬치를 숯불에 구워대는 요리사들...


이쯤되면, 이 야시장에 대한 감상, 나아가 모로코란 나라에 대한 감상을 하나 도출해낼 수 있다.

 혼돈.

이 나라에 도착한 후 부터 계속해서 혀 끝에서만 맴도는 감상이 바로 이것이다.

모로코는 행정력의 부재일지 문화적 정체성일진 몰라도 혼돈 속에서 유지되는 나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에이스가 퇴사한 후에도 엊지저찌 굴러는 가는 중소기업'이 국가화 된 모습이랄까.

이 감상에 대한 마침표를 이 야시장에서 찍을 수 있다.

해는 이미 넘어가 완전한 어둠이되, 여기저기 밝혀진 전등과 사람들의 열기가 이를 밀어내는 곳. 이역만리 타지에서 온 내가 이 혼돈에 압도된 채로 주변을 둘러보면 모로코 사람도 나와 같은 표정인 곳.

신기한 것은, 이 혼돈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평상시의 나를 생각하면 굉장히 놀라운 일인데, 이 곳에서는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 혼돈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최악의 경우 모든 소지품을 잃어도 문제없도록, 여권과 지갑마저 두고 150디르함과 휴대폰만을 들고 나선 참이다. 150디르함이면 2만원 남짓. 이정도는 호구잡히고 삥을 뜯겨도 괜찮다. 그것마저 이 혼돈의 일부일테니.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시장에 뛰어든다.

처음 한 일은 한 바퀴를 돌면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구경한 것이다. 어떤 곳은 악기연주가, 어떤 곳은 야바위가, 또 헤나 그리기, 길거리 게임, 숯불 꼬치구이, 다시 악기 연주...

이쯤해서, 발터 뫼르스가 이 풍경을 참고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천막이 없을지언정 하늘 높이 솟는 연기무리, 여기저기 벌어지는 공연이 그렇다. 만약 아니라면 대단한 일일 것이다. 상상만으로 이렇게나 잘 묘사했다는 뜻일테니.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호객꾼을 무시하며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것은, 모든 가게에 일련의 번호가 있다는 것이다. 최대 세 자리 수까지 발견했는데, 아마도 장사 허가를 받으면서 부여받은 고유번호가 아닐까?

꼬치구이 가게들을 비집고 돌아다니다 문득 목표를 정했다. 21번 가게를 찾아서, 거기서 파는게 뭐든 먹자. 21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 다비드 실바의 등번호이다. 아무 근거도 도움도 안되겠지만, 그저 목표를 가지고 이 난장판을 돌다다니고 싶었다. 또, 이렇게 숫자와 축구선수 등번호를 연관지으니 재미가 붙었다. 저기는 필 포든, 저기는 하키미, 손흥민...

그러나 다비드 실바보다 먼저 발견한 것은 르로이 사네와 데브라이너였다. 19번 점포의 호객꾼이 나를 붙잡는데, 오히려 눈에 띈 것은 바로 옆의 17번. 이것도 운명이겠거니 하고 17번으로 간다. 19번 호객꾼에게는 여기가 더 맛있어보인다며 뿌리친 참이다.

양고기, 닭고기, 생선을 하나씩 고르고 자리에 앉은지 얼마 되지않아 구워진 꼬치가 나온다. 생선은 꼬치가 아니었고, 그냥 튀김이었다(어떤 생선인지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이걸 이미 각 자리에 놓여있는 빵과 먹으면 된다. 나는 평상시답지 않게 가격도 보지 않고 주문과 식사를 마쳤다. 역시나 내가 여태 식당에서 냈던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짐작에서 꽤 벗어난 숫자가 나온다. 돈이 이것밖에 없다면 우는소리를 해봤다가, 메뉴판까지 들고오는 '보스'(점원이 그를 이렇게 부른다)에게 결국 굴복한다.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 이제 공식적으로 내가 이 혼돈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지므로. 물론 밖에서 쳐다보는 이에게 난 소용돌이를 따라 빙빙 날아다니는 트럭 같이 눈에 띄는 존재겠지만, 그 트럭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편안에 이를 수 있는 거니까.

끼니를 해결해서인지, 나의 미션도 금방 끝났다. 21번 찾기. 다행이도 평범한 과일주스 트럭이다. 나는 언젠가 사먹어야지 했던 복숭아 주스를 주문해 조금씩 마시면 자축한다.

주스를 반쯤 마시며 돌아다니다 자리잡은 곳은 낚시 게임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하는 곳이다. 동심원의 가운데 테이블엔 조명 역할을 하는 램프가 깜빡이고, 그 주변을 방사형으로 탄산음료가 든 페트병이 퍼져있다. 이 동심원을 둘러싼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주고 검은 고리가 끝에 달린 나무 낚식대를 든 후 그 고리를 페트병 주둥이에 끼우려 시도한다. 처음엔 쉽지 않을까 싶었는데, 점차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낚시대를 든 십수명의 사람들은 보다보니, 어렸을 적 이승엽의 홈런볼을 잡아내기 위해 잠자리채를 들고 모인 수백명의 광경이 떠올랐다. 대상은 다를지언정 열중하는 모습은 비슷하구나 싶다.

생전 처음 보는 게임을 보고있자니, 게임의 이름과 정확한 플레이 방식이 궁금해졌다가, 다시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왠지 그냥 미지의 게임으로 남기고, 이방인인 나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해석하고 이름붙이고 싶다. 아직은 마땅히 떠오르지 않지만 말이다.


게임 구경을 하다 이제 숙소로 가야하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시간이 늦지 않기도 했고 조금은 더 이 시장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바퀴를 더 도는 와중에, 어떤 현지인이 나에게 영어로 자연스럽게 말을 건다. 깡마른 체구에 눈이 큰 중년 남성이었다.

이렇게 여행자에게 접근해 친절을 베풀고 돈을 요구하는 경우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마음 속 가드가 내려갈 정도로 자연스럽고 교묘했다. 말하기를 지금은 여러 장사꾼들이 모두 모여있고 현지에서도 관광철이라 여기 오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했다. 평소보다도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영어를 잘한다며, 나에게 각 무리들을 소개해주겠다 했다. 솔직히 이때까지도 전혀 돈을 받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말 진절을 베푸는 사람이구나, 고맙구나 싶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따라 여기저기 다니며 베르베르족 공연, 알제리 공연, 코미디 공연 등 가이드를 받던 와중 드디어 깨달았다. 나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왜인지 설명해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해 돈을 요구할 것 같은 생각에 가야한다 말한다. 그는 막판에 자기가 가족을 모두 잃고 여기서 3개국어를 배워가며 일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나는 그가 가르쳐준 것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도움은 되었으므로 돈을 지불할 각오는 했다. 물론 현지 물가를 고려해 10디르함이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디르함을 보자마자 부족하다며 더 요구하는 그에게 난 내가 가지고 있는 지폐만큼은 보여주지 말아야겠다 생각했고, 동전을 뒤지는 내 손가락에는 또다른 10디르함과 1디르함 몇개가 집혀나왔다. 아... 1디르함만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내가 처음 건넨 10디르함과 새로 나온 10디르함을 보더니 얼른 둘 다 가져가려 했고, 20디르함이면 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걸 아는 나는 주기 싫어 서로 동전 하나를 잡고 온갖 힘을 주고있었다. 그 와중에 내 손에서 1 디르함들이 떨어졌고, 그는 혼란의 와중 속 결국 20디르함에 더해 내 손에 있던 1디르함 2개까지 가져가는데 성공했다.

이쯤되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던 나는 그를 두고

즉시 시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비로소 이 야시장의 밤이 완성되는 느낌이기도 했다. 이제 호구도 잡혔으니 해볼 건 다 해봤다 싶은, 그런 심정이어서 조금은 후련했다.


숙소의 발코니에 앉아 시원한 바람과 흔들리는 조명을 맞으며 이 글을 쓴다. 아무래도 이 밤은 당분간 잊히지 않을 밤이다. 이 글이 잊히지 않음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댓글